박명자 개인전 색과 질감

박명자
2025 04/30 – 05/05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전시서문: 박명자 개인전색과 질감 _ 윤석원(코스모스아트랩)

이번 전시 ‘색과 질감’은 박명자 작가의 회고전이자 첫 개인전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직후 출생한 작가는 한국전쟁은 물론 곡절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필부匹婦의 삶으로도 순탄치 않았을 그 시절, 홀로 사업을 이끌며 숱한 좌절과 성취를 맛보며,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생을 경험했다. 이번 개인전은 늦은 나이 얻게 된 병마를 이겨내며 시작한 그림과의 인연을 키워 작가로 성장해온 걸음을 되돌아보고, 새로이 맞이할 시간을 여는 신선한 발돋움이다.

 

전시는 1층의 거친 천위에 그려진 근작들과 특별전시실(B1)의 졸업작품을 포함한 초기작들을 주로 살펴볼 수 있게 구성되었다. 초기습작들은 주변의 사물을 화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본 결과물이다. 간결한 구성과 꼼꼼한 필치로 대상이 지니는 질감과 색감, 빛과 사물의 관계 등을 고심하며 조형언어의 기본을 단단히 다졌다. 이후 작가의 시선은 서서히 확장됐고, 자연스레 외부 풍경으로 옮겨져 본 전시실 작품 속에 담겼다. 1층 작품들은 차츰 회화적 형식과 깊이를 더하며 다채로운 실험이 시도됐다. 캔버스에 황마 黃麻 천을 덧대 거친 질감을 만들고 여행지 풍광과 근경의 식물 등을 정성 다해 그려내며 작가만의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박명자 작가는 평생 의류업에 종사하며, 계절을 앞서 분망히 변하는 유행을 감각에 의존해 결정해야만 했다. 셀 수 없는 긴장의 순간들에 대한 위안이 필요해서였을까? 긴 시간 체화된 색과 질감에 대한 방대한 경험은 더 이상 유행과 이문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작가의 주관과 순수한 표현 욕구로 화면 위에 쏟아졌다. 작가는 자신이 평생 그림과 무관히 살아왔다 했지만, 날 선 시각과 손끝만으로 숨 가쁘게 옷을 골랐던 그 숱한 선택의 순간들이, 어쩌면 흔적도 남지 않는 드로잉이었을지 모른다. 매끄러운 캔버스만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기 어려워서였을까? 떠밀리듯 지나온 시간의 마디에 저항을 걸듯 하나씩 곱씹으며, 어느 순간 놓쳤을지모를 이야기를 깊은 천 속으로 꾹꾹 눌러 채웠다. 그렇게 박명자의 그림들은 맹렬하게 흐르던 시간과 계절을 붙잡아 우리 눈앞으로 옮겨 왔다.

 

정물로 시작된 작업은 여행지의 풍광은 물론, 대자연의 장엄함과 문명의 유구함, 생명에 관한 탐구로 이어져 작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작업은 자화상으로 또 현재 생활 공간으로 돌아왔다. 작가가 늘 바라보았을 발코니 풍경과, 매일 오가던 평범한 길들은 더 이상 같아 보이지 않고 반복된 일상에 담겨있을 숨은 가치를 발견해 그려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며 지난 시절과는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바라본 세계는 더 이상 이전에 알던 세계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사물과 현상을 면밀히 응시하고, 여행지의 들뜬 정취와 과거를 고요히 복기하는 동안 다가올 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렇게 박명자 작가는 더욱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암 투병을 극복하고 70세의 나이로 미술대학 공부를 시작했던 늦깎이 미술학도는 열정과 끈기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작가가 되었고 그 여정은 그가 그려낸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울지 모른다. 박명자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질감과 색의 조화를 통해 촉각적으로도 느껴지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은 박명자 작가의 삶과 예술적 성취를 함께 살펴보고 그 여정을 공유하며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 자못 무모하다 했을지도 모르는 그 선택을 기어코 옳은 선택으로 만들어낸 작가에게 응원과 찬사를 보낸다. 이 순간을 통해 그간의 시간을 잠시 갈무리해 보며, 앞으로 그려낼 작품을 기대한다.

 

작가노트 : 박명자_예술 그림을 그리는

 

입안에 말이적고, 마음에 일이적고, 뱃속에 밥이적고,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다면, 신선도 될 수 있다.

말이 안으로 여물도록 인내함은 내 안의 질서를 찾아 내는 것이고

중심이 바로 세워 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가려내는 그런 것이 눈 뜸이다.

옛 선사님들의 말씀이며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문득 얻는 깨달음의 길이며 힘이다. _어느 선사의 말씀中

붓을 들고 캔버스로 물감을 옮기다 보면 말도 할 필요가 없고, 마음도 텅비어 일이 없으며 시간이 흘러감도 잊어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나고 느끼고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옷장사 35년 이라는 세월을 살다가 병이 생겨서 하던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어쩌다 병과 같이 살다 보니, 새로 태어난 것 같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용미술 예술학교, 그림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것 같았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것 들.

그림은 질감과 색의 조화입니다. 의류, 옷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 놓은 옷도 질감과 색의 조화가 맞지 않으면 백장도 팔기 어렵고 전부 재고가 됩니다. 바느질이 좀 허술해도 질감과 색의 조화가 잘 맞으면 몇 천장도 단 시일에 없어서 못 팝니다. 내게 그림은 질감이고 색의 조화입니다. 어느 전시장에서 200호도 넘어 보이는 대형 캔버스에 천을 대고 각각 색을 다르게 발라놓은 추상 작품을 봤습니다.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면서도 오랜세월 천과 한 몸같이 지냈기에 친숙함이 느껴졌습니다.

질감과 색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고 설레게 하고, 선택의 길에 서게 했던 것들입니다.

한 순간 선택에서 몇 백 몇 천만원이 사라지고 또한 들어오기도 했던 순간의 날들…

언제나 내 머릿속과 마음은 질감과 색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도 캔버스에 천을 대고 그림을 그려볼까? 그려보고 싶어졌습니다. 황마黃麻천을 구입하고 캔버스에 덧대어 20호 목련 첫 작업을 무사히 그려냈습니다. 질감의 목마름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것을 시작으로 차츰 크기를 늘려 10여점이 넘는 작업들을 이어그리며 80년 살아온 세월 앞에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