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진 개인전 Scrape Memoria 긁혀진 기억

박현진
2019 05/01 – 05/13
2 전시장 (2F)

Scrape Memoria – 긁혀진 기억

 

1990년 여름 방학 중학교 1학년 재학당시 갑작스레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뉴욕에서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은 나에게 잊지 못할 기억들을 남겼다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뉴욕에 정착하려고 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학 졸업 후 갑작스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의 기억들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긁힌 자국처럼 희미한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참 방황하던 시기 미국에서 찍었던 비디오를 틀어 놓고 그곳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하며 과거기억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비디오테이프가 오래되 틀어놓은 화면이 변질되고 테이프가 긁혀 망가질 때까지 몇 백번은 돌려본 것 같다. 오래된 테이프가 녹아내려 끈적하게 얽혀져 망가진 후에는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골라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몇 시간이고 바라보곤 했다. 그 당시 비디오 그리고 사진들의 이미지들이 데자뷔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지난 과거의 흔적들이 내면적 상상의 세계에서 기억이란 사색의 공간을 자아냈고 기억의 천으로 덮여진 그 장면들이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되어 지금의 작업방식이 되었다. 반복되는 기억들은 비디오 장면들처럼 재생되며 잊혀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기억속의 순간들에 대한 끈적이는 집착을 가져다준다.

작품에 나타나는 겹쳐지는 이미지들은 기억이란 사색의 회화적 언어를 담고 있다. 캔버스에 배경을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색을 입히고 즈그라피토 기법을 사용해 다시 긁어내고 벗겨낸다. 그 후 또 다시 색을 입혀낸다. 이 모든 수고스러운 과정은 나의 기억의 흔적과도 같다. 겹쳐지는 이미지들은 기억의 흐름과 순간을 상징하며 긁어내는 행위는 나에게 카타르시스와도 같은 것이다. 긁어내기는 기억과 잊혀짐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우면 지울수록 끈적거리는 기억의 흔적이 긁어낸 자리에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게 있어서 즈그라피토 기법의 긁어내기는 과거의 회상을 담고 있는 사진을 통한 나의 내적 경험을 의식화하는데 가장 적합한 테크닉이라고 생각한다. 기억과 망각사이의 만남을 긁어내기란 기법으로 사진이란 매체를 통해 기억의 재현으로 드러난다. 사진은 우리가 다시 지각하고 기억하게 한다. 베르크손은 잠정적으로 지각을 구체적이고도 복잡한 나의 지각, 즉 나의 지각들로 가득 차 있고 항상 어떤 두께의 지속을 지니는 지각으로 이해하지 말고, ‘순수지각’ 나처럼 살아 있지만 현재에 흡수되어 있으며 모든 형태의 기억이 배제됨으로써 물질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순간적인 시각을 얻어낼 수 있는 존재가 가질 지각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사진이라는 하나의 매체를 통해 기억이라는 자유의 표현을 회화로 재해석함으로써 베르크손이 야기한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지각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의 순수인식의 경험을 추구한다. 관객들의 무의식속 세계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기억과 지각의 공간을 창조해낸다. 기억은 행동, 지각, 지속 그리고 생명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드러낸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더듬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억압당한 기억을 뛰어넘는 ‘초월적 순간’을 경험하는 동시에 작품에 비친 기억의 흔적이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부언하고 싶다.

사진을 통해 우리가 겪는 ‘기억’은 이미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이 다시 회화 즉 그림으로 재해석 될 때 우리의 기억이 응축되어 자유의 표현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과거의 포착 방식에 작가만의 특유의 기법과 심리적 지각 그리고 무의식이 더해져 그 모든 요소들이 작품에 투영된다. 긁어내기의 강약이 사진을 통해 느끼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회화적 투사에 의한 내면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긁어내기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과거 기억의 흔적 그리고 그 안에서 포착된 절제된 순간들을 표현하고 작품을 통해 느끼는 감정들을 분출하는 동시에 해소하는 방식이다. 긁어냄과 겹쳐지는 이미지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기억과 지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을 현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이끈다. 작가의 기억과 잊혀짐의 상호관계를 심리적으로 코드화한 지각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가 또 다른 형태의 ‘데자뷔’를 이끌어낸다. 결국 작품속 내용의 결말에 안착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지각 속 끊임없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새로운 맥락에서 이어갈 수 있도록 기억 속 탐닉을 추구하는 것이다.

 

 

* Keywords

즈그라피토, 긁어내기, 끈적임, 데자뷔, 기억, 무의식, 지각, 흔적,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