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정 개인전 Harvest form the Earth

이혜정
2025 11/12 – 11/17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소멸의 기록, 시간의 증언

_ 느림의 미학을 통한 생태적 전환

홍경한(미술평론가)

 

2.

작가의 작품은 외견상으로 보면 분명 인간에게 ‘먹히는 존재’를 통해 만들어낸 정물화에 불과할 수 있지만 실은 일상적 노동의 미학적 재구성이자, 소비 행위에 대한 성찰적 거리두기이다. 여기에 ‘환경보호’ 의식까지 관통한다.

그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농작물 재배 조건이 변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위기는 현재의 농업 방식이 생태계의 다양성과 자연 순환 체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후변화를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구축한 사회경제 체제의 결과물로 보는 체계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획일화된 품종 위주의 대규모 생산 체계와 제한된 작물 종류, 신속한 생산 과정, 유통의 편의성을 우선시하는 세계적 농업 패러다임을 향한 그의 문제제기는, 작품의 영역을 개인적 사유에서 사회 제도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탈바꿈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품엔 화사한 꽃의 이미지와는 달리, 역설적이게도 상업화된 농산물의 본질적 생명성 소실, 시장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농산물의 소외, 이로 말미암은 식생활의 획일화와 빈곤화 현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앤토타입 기법의 비효율성과 불확실성은 작가 작업의 내용과도 깊이 연결된다. 이는 효율성 중심의 현대 시스템에 대한 의문으로, 속도와 즉시성이 지배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의식적 저항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와 같은 반효율성의 선택은 개인적 선호가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예측 가능성과 통제 가능성을 추구하는 현대 구조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불확실성과 실패 가능성을 포함한 생명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이다.

작가는 작가노트에 ‘기억이 아닌 예언의 언어’를 지향한다고 적었다. 과거를 보존하는 전통적인 기록의 역할을 벗어나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에 가시화하는 예술의 예언적 기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실 다가올 식탁의 결핍을 앞당겨 보여주는 시각적 증언으로서의 사진은, 예술이 미적 경험이 아닌,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의 풍요에 대한 기억은 미래의 결핍에 대한 예언과 만나고, 현재는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이처럼 기억이 아닌 예언의 언어는 이혜정 작업을 형성하는 여러 문법 중 하나다.

이 밖에도 관심 있게 봐야할 요소는 더 있다. 일례로 이혜정의 작업은 정물화처럼 다가오는데, 식재료를 정물적인 형상으로 구성하는 작업은 17-18세기 정물화의 바니타스(vanitas)와 연관된다. 그러나 이전의 정물화가 물질적 풍요와 그 덧없음을 동시에 보여주었다면, 그의 작업은 풍요 자체의 ‘부재 가능성’을 다룬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소멸의 과정을 내포하고, 이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과거의 정물화에서 암시되던 소멸을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으로 전환시킨 사례다.

식재료에서 추출한 색소로 식재료를 촬영하는 자기언급적(self-referential) 구조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대상과 매체의 경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개념적 조작이다. 먹을 것이 보는 것이 되고, 소비의 대상이 예술의 매체가 되는 전환은 인식론적 전복을 함의한다.

특히 작가의 작품은 기후위기와 식량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적 체험과 성찰의 차원을 잃지 않는다. 기후위기, 환경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의제를 일상적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그리고 식재료의 변화를 넘어선, 다시 말해 식탁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 전체가 변화할 가능성에 대해 짚는다.

그의 작업들은 대안사진(alternative photography)의 맥락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기법을 되살리는 것이 잊혀가는 향수나 기술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명확한 개념적 근거가 필요하다. 이혜정의 경우 생태적 위기라는 시급한 현실적 문제와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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