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정 개인전 조명하는 존재 illuminating existence –변칙적 층위 anomaly layer

정현정
2022 09/28 – 10/03
2 전시장 (2F)

정현정 JUNG HYUN JUNG 개인전

조명하는 존재 illuminating existence –변칙적 층위 anomaly layer

 

– 작가노트 –

illuminating existence는 ‘조명하는 존재’와 ‘이해를 돕는 존재’, ‘분명하게 하는 존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빛은 눈으로 보이지만 존재를 인식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자체에 대한 신비감은 더해간다. 이러한 빛의 형상을 기하학적 추상의 ‘빛’으로, 또한 작품 안에서 보이는 존재로 이미지화함으로서, 역동적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모티프들의 인지적 효과로는 사선의 역동성과 수직의 역동성 등 ‘역동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조형의 원리는 디멘션 교차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주로 빛을 상징하는 특수성을 지닌 오브제 (painting으로 재현이 어려운 오브제)와 페인팅의 조합으로 모티프 자체에서 발생하는 빛과 그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빛을 구현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기하학적 구성요소들은 규칙성을 띄기도 하지만, 불규칙성, 이를테면 규칙으로부터의 탈주를 보이고 있다. 불규칙성은 인간의 삶속에서 우연이라고 말하는, 혹은 예기치 못한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 대한 사고에서 비롯되며 이는 화면에서 조형요소들의 변칙적 배열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한편, 프랑스 사상가 가타리 (Félix Guattari)는 그의 저서 《카오스모제》에서 그의 분열분석과 생태철학이 만나, ‘카오스모제'(chaosmose)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출해냈다. 이는 카오스(chaos, 혼돈), 코스모스(cosmos, 질서), 오모제(omose, 상호침투)의 합성어로, 혼돈과 질서가 상호 침투하는 생성의 과정을 일컫는다. 가타리는 새로운 생태적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질적이고 특이한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있어야 생태적 다양성이 커질 수 있으며, 특이한 것들이 나타나 기존의 질서를 새롭게 구축해야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카오스모제 속에서 예술적 생성을 통해 새로운 자기 준거를 만들어 갈 것을 촉구한다.

 

나의 작품은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듯 카오스모제로서의 빛의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불규칙적, 변칙적(anomalous) 피스(piece)들의 조합으로 어울리지 않는 매체들과 모티프들이 일종의 집적의 상태로 드러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칙적 피스는 변형캔버스, panel, 그 밖의 오브제와 그려진 모티프를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즉, 이러한 변칙적 피스들은 일련의 흐름 속에서 층위로 구현되는데 나는 이를 변칙적 층위(anomaly layer-아노말리 레이어)로 명명하고자 한다. 이는 고정점을 향해 형상이 규칙적으로 드러나다 탈주하듯 변칙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조형의 균형으로의 구축된 결과물이다. 마치, 우연처럼 던져진 ‘변칙’에 대응하며 그 다양성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일종의 불규칙, 부조화 속 조화를 형성하며 그 과정 자체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카오스와도 같은, 삶속에서 발생되는 우연적 사건에 대한 창조적 대응으로 환원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기하학적 형상으로 드러나는 은유의 대상은 빛과 어두움 사이를 유영하며 때론 방향성을 추구하며 밝게 빛나는 상태, 혹은 혼돈의 상태, 분리 또는 불안정한 상태를 느끼게 한다. 이는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이길 원하며 인간 실존의 빛을 내포한다.


 

삶의 본원적 질서와 시대성에 대한 사유

 

김보라(예술학/미술비평, 홍익대학교 회화과 초빙교수)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연의 원인과 법칙을 연구하는 가운데 가장 즐거운 일은 빛을 탐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빛이란 무엇인가. 빛은 창조의 시작이자 생명의 근원이다. 오랫동안 진리와 이성의 상징이었으며 다 빈치뿐만 아니라 수많은 미술가의 관심 대상이기도 했다. 빛을 표현하기 위해 금이나 화려한 보석을 재료로 사용하거나 색채와 명암을 도입해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어쩌면 미술사 전체를 지탱해온 것은 빛을 추구한 인간의 끝없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중세를 대표하는 회화 형식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황홀한 빛,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 보이는 극적인 빛, 라투르의 회화 전체에 은은하게 번지는 빛, 페르메이르 작품 속 무수한 노란 색점, 인상주의자들이 자유분방한 필치로 포착한 자연광, 미니멀리스트 댄 플래빈의 형광등,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작업까지 빛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미술작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오랫동안 빛을 향한 예술가의 열망을 타오르게 했을까? 그것은 빛이 부여하는 생명감과 상징적 의미,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빛이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정현정은 이처럼 미술사의 전통적 주제인 빛에 기하 추상의 언어로 접근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 형태는 원과 사각형, 그리고 사선이다. 사선은 움직임과 변화를 나타내며 방향성과 속도감을 유도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빛의 속도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새로운 세기의 역동성과 속도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던 영국의 소용돌이파(Vorticism)나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화면에서 감상자의 눈을 강력하게 이끄는 사선이 두드러졌던 특성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화면을 지배하는 색채는 은회색이다. 빛과 색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의 색채는 도시의 인공적 빛을 반영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정현정의 화면은 크게 물감으로 칠해진 색면과 콜라주로 구성되는데, 종종 거울과 유사한 재료를 통해 세상을 비추는 미러링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도 시대적 감수성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정현정에게 빛은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그렇다면 그가 회화 언어로 포착하고자 하는 빛은 정확히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 그는 빛을 묘사한다기보다 빛의 핵심적 특성과 본질을 추출하여 가시화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빛에 대한 정현정의 탐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특정 시공간에 대한 기억과 결부된 빛이 아니라 모든 현상을 초월한 관념적 빛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기에 우리에게 대상이 보이는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맞닿은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동시대 시각 환경과 도시 속 일상의 빛 경험에 내재한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작업에 도입하고 있는 다채로운 소재와 화면 조합 형식에서 이러한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콜라주에 활용되는 글리터 재질이나 반사 필름이 초미학화된 삶과 나르시시즘 문화를 반영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작가는 형이상학적 빛과 시대의 빛, 이 두 가지 모두를 아우르면서 회화적 표현과 추상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을 넘어선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함께 2008년 제1회 개인전 이후 일관되게 이어오고 있는 시리즈 제목 <illuminating existence>처럼 자신의 작품 자체가 빛나는 존재이길 바라는 소망을 담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현정의 작업은 원, 사각형 등 기하학적 조형 요소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부분과 부분을 이어서 전체를 이루는 방식인데, 밑그림을 미리 완성하고 그에 근거하여 작품을 구현하기보다는 작업 과정 중 하나의 이미지에서 다음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연결, 중첩하고 조율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말에서 기하 추상이라는 엄격한 조형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우연성의 개입을 수용하는 유연한 작업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스스로 ‘변칙적 층위’라고 칭하는 특징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2019년부터 그는 자신의 작업을 ‘카오스모제(chaosmos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혼돈(chaos)과 질서(cosmos), 그리고 상호침투(osmose)를 결합한 단어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 Finnegans Wake』(1939)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같은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나 움베르토 에코의 책에 나오는 ‘카오스모스(chaosmos)’와 연관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정현정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특히 가타리가 마지막 저서 『카오스모제 Chaosmose』(1992)에서 강조하고 있는 복잡성과 카오스 사이 ‘끊임없는 왕복’, 역동적 상호침투와 개방적 작동,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을 가시화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1980년대 이래로 기하 추상의 재평가 작업을 진행한 ‘네오 지오(Neo- Geo)’ 화가의 작품과 비교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피터 핼리(Peter Halley, 1953- )의 작품에 견주어 보자. 기하학적 형태라는 모더니즘 회화 양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푸코와 보드리야르의 철학에 기반을 둔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을 구체화하고 형광 안료와 건축 재료 등 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한 매체를 활용하는 핼리의 작업은 정현정의 회화와 교점을 지닌다. 그런가 하면 독일의 추상화가 이미 크뇌벨(Imi Knoebel, 1940- )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 공간 설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정현정의 작품과 연결지어 볼 수 있다. 절제된 화면으로 형태의 본질과 순수한 인식을 추구한다는 점도 상통하지만, 크뇌벨의 작품에 비해 정현정의 작업은 빛이라는 특정 주제에 천착하면서 콜라주를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색채나 형태에서 좀 더 차가운 느낌의 기하학적 추상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면에서 차이점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와 속도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던 미래주의자 자코모 발라는 거리의 전기 불빛 탓에 달빛이 가려지는 광경을 <가로등(Street Light)>(1910-1911)이란 회화 작품으로 그려냈다. 이 그림으로 짐작해보건대 이미 20세기 초부터 사람들은 과학기술 발전으로 생활 곳곳에 스며든 인공 빛이 자연광을 가릴 것이라 예견했던 것 같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심의 전광판, 영화관 스크린, 컴퓨터 모니터, 태블릿, 휴대폰 액정화면 등, 일상에서 우리의 눈을 잡아끄는 대상은 대부분 밝은 빛을 뿜어낸다. 대형 건물 곳곳에 미디어 파사드가 설치되거나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광고판이 디지털화되면서 인공 빛이 나오는 화면이 24시간, 우리 삶 전체를 잠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부지불식간에 개인 취향을 분석하고 있는 알고리즘에 따라 계속적으로 눈앞에 제공되는 볼거리 문화, 모든 것이 표면에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져버리는 듯한 삶 속에서 정현정의 예술은 ‘본다는 것’의 근원과 존재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