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경 박사청구전 Memory of Dots

최유경
2018 12/26 – 12/31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최유경의 «Memory of Dots» 연작: 기억의 덫

 

서영희(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최유경의 평면작품에는 수많은 작은 점들이 있다. 점들은 윤곽선으로 구획된 평평한 화면공간 안에 거의 균질하게 세세히 찍혀 있다. 하지만 이 점들이 밀집되거나 희박하게 펼쳐진 경우, 전체 형태에 여리고 델리케이트한 명암 효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들 미세한 점들은 상대적으로 분명하고 짙은 선묘와 대조를 이루며, 후자와 더불어 형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주된 조형요소로 작용한다.

윤곽선 안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점들 앞에서 아마도 어떤 관객은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점들을 연상할 수 있겠다. 필자는 처음부터 최유경의 작품을 쿠사마의 작품과 분별할 필요를 느낀다. 쿠사마의 점들은 강박적으로 무한 증식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주변 공간을 잠식하거나 강하게 장악해버린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에 최유경의 점들은 그 반복 과정에서 불안한 신경증적 편집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점은 선의 유연한 흐름을 타고 움직이며, 관대하고 여유롭게 형태의 공간화 과정을 돕는다. 주변 공간을 지배하지도 장식적으로 패턴화하지도 않는 이 점들은 선, 형태와 더불어 공간과 대화를 나누거나 관객의 시선을 고요히 내면화시키는 이미지를 형성해낸다.

작가에게 점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필자가 던진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 … 점을 의식의 입자로 인식하며, 기억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최소한의 요소로 간주”한다. 이 답변은 결국 그의 작품 앞에서 떠오르는 궁금증들을 단숨에 해결하게 한 열쇠가 된다. 그렇다. 판화와 드로잉 및 영상미디어를 매체로 사용하되, 그는 요즘 흔히 그렇듯 개별 매체의 특수성에 함몰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각 매체를 통해 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점과 선 그리고 형태를 자신의 이미지로 나타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점과 선이 서로 융합된 이미지들을 가로지르며 무의식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왕래하는 의식의 미묘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들은 시간의 지속을 통해 의식 아래로 잠재되어 있다가도,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계기를 통해 현실의 시공간 위로 불쑥 솟아올라 실제화된다. 최유경은 이러한 내적 경험을 미세한 점들 즉 의식의 입자들로 표출해내고 있으며, 이 사태를 정적인 선과 형태로 보완하여 시각화하고 있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했던 것과 같이, 그는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순수-기억’들을 점과 선이란 감각적 수단을 사용해 ‘이미지-기억’으로 치환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점들은 이 글 제목처럼 잠재된 의식인 ‘기억의 덫’ 혹은 ‘기억의 닺’이라고 환유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dot’은 한글로 점이라 번역되거니와, 점을 찍는 일은 대상을 세세한데 까지 소홀히 않고 분명하게 함을 말한다. 불확실하고 애매한 의식 아래에 있는 기억을 감각적 기호들인 점과 선으로 소환해내 분명하게 표상하려는 그의 예술의지를 유념한다면, 점들은 망각된 기억을 포획하거나 사로잡은 덫으로 해석될 수 있다(흥미롭게도 덫을 전남 지역 방언에서는 닷/dɔt/으로 발음함). 또한 의식 밑에서 부유하는 기억들을 현실태로 고정시키는 닺이라 상기해볼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작가의 전시 표제인 <Memory of Dots>에서 에둘러 확인할 수 있다.

 

식물과의 대화

최유경의 심리적 근저에는 항상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는 유년기부터 식물원의 정적이고 고요한 공간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마치 조선 사대부 계층 여성화가들이 유독 ‘조충도’나 ‘화조화’를 즐겨 그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해도 필자는 후자들의 그림을 최작가의 작품과 직접 비교할 의도는 없다. 다만 작가 역시 식물들의 공간에서 내면의 안정을 얻을 뿐 아니라 제작을 위한 영감과 상상력을 획득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식물의 구체적 종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그보다는 어느 장소에서 본 어떤 형태의 식물인지가 더 마음을 끌곤 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작품 <H>의 경우, 홍콩(Hongkong)의 식물원에서 본 식물의 형태, 그 앞에서 이루어진 내밀한 의식의 대화가 기억으로 떠오른 탓에, 곧바로 자신의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식물과의 대화는 그의 일상의 작업노트로 전이되고, 각각의 식물 이미지는 개별 존재자 내지 개별 주체의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이러한 독특한 관점을 증명하는 샘플 이미지들은 이번 전시회에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드로잉, 디지털 프린트와 실크스크린, 콜레그래피, 지판화 등으로 표현된 식물들은 그에게 있어 개별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자들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작가의 전시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흥미로운 점은 그가 꽃이나 열매보다 녹색 잎들, 그것도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크고 넓은 잎사귀들을 모티프로 즐겨 취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로트링펜으로 그린 거대한 드로잉 12점의 잎사귀 형상들은 우리에게 압도적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클로즈업된 식물 잎사귀들의 짙은 윤곽과 작고 무수한 점들은 자연과 생명에 관한 작가의 깊고 내밀한 의식을 대변해주며, 마치 현미경으로 본 듯한 줄기와 잎사귀의 형상은 개별 존재자의 생동감 있는 표정처럼 박진감 있는 형태로 다가온다.

한편 작가의 모든 식물 모티프들은 어느 경우에라도 동일한 형태나 동일한 화면 구도를 회피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작품은 이질성의 익명적 형태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화면 공간을 구성하는 식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미셀 푸코가 강조한 사회학적 공간 개념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떠올려 짧게나마 부언해보려 한다. 실제로 작가의 식물 모티프들은 제각각 생명체로서 상이한 존재적 정체성을 한 화면 안에 투영해낸다. 그야말로 하나의 공간 안에 서로 다른 감성들이 나란히 공존하고, 무위로 함께 있음의 공동체 내지 생태계의 군집을 암시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 결과 그의 회화(혹은 판화) 공간은 비결정적이고 불특정한 성격의 공간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질적인 생명체들이 상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집단적 삶의 공간을 형상화(configuration)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가 ‘공간이란, 집단적 삶이 가지는 모든 형태의 근본’이라 말하며 가리키고자 했던 저 사실 즉 공간이 개별적 의미로 존재하지 않고, 구성 인자들 상호간의 관계맺음을 통해 구축된다는 점을 머리에 떠올려주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필자가 보기에 작가의 식물 그림들은 미학적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로 선별되어, 균일한 동질 공간-유토피아 공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나아가 불확실성, 중첩, 관계맺음 등의 개념을 표상(presentation)하는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경우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