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개인전 분청, 새김의 흔적

김진규
2019 09/04 – 09/09
본 전시장 (1F) 특별 전시장 (B1)

감추기와 드러내기,

김진규의 전시에 부치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회화와 조각과 같은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작가(作家)이면서 장인(匠人)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가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재료를 다룰 도구를 만들고,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물질로 형상화하는 작업에서 그것은 아마도 일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흙과 물과 불을 재료로 삼는 도자(陶瓷) 작업은 그 성질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질적인 두 재료의 연대과정이다. 흙(土)은 물(水)로써 형상을 얻지만 불(火)로써 그 물을 온전히 버린 후에야 자기로 탈바꿈할 수 있다. ‘흙이 물에 들어가서 불에서 나오는’ 자화(瓷化)는 두 재료가 지닌 극단의 세계를 거친 후에 얻는 조화(造化)이기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구체적이고 지난하며 작품은 그 시간의 축적이다.

작가는 이십여 년 동안 인화문(印花紋)에 집중했다. 그간의 작품에서 구현된 정밀한 인화문은 그가 이미 15세기 분청사기에 꽃을 새긴 조선 사기장인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지속된 작가의 작업은 표면을 빈틈이 없이 채우는 전면적인 것이었고 이 때 흰 분장(粉粧)은 압인(壓印)으로 생긴 촘촘한 틈새를 메워 만개한 꽃들의 무늬를 짜는 실(絲)과도 같았다. 그 짜임은 꽃이거나 잎이거나 어슷한 선이거나 점이었다.

작가가 이 번 전시에 내 보이는 분청항아리들은 길쭉하거나 둥글다. 길쭉하여 키가 큰 항아리는 조선시대 전기의 분청사기 항아리를 닮았고, 그 수가 좀 더 많은 둥근 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의 백자 달항아리를 닮았다. 어느 쪽이든 치우친 정도는 크지 않고 당당함은 경직됨이 없어서 보는 이의 시선이 편안하다. 이 자연스러운 형태의 틀에 작가는 공들여 짠 밀도가 높은 인화문을 본격적으로 감추었다. 아껴서 조금만 드러냈다. 큰 변화다.

그릇의 표면에 무늬를 짜는 실과도 같았던 흰색 분장은 빼곡한 인화문을 감추는데 사용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흰색 분장토의 일부분만을 긁어냈을 때 인화문 바탕 자체가 꽃, 나비 등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반전의 방식이다. 또 인화문과 흰색 분장토 사이에 입힌 여러 가지 색깔의 분장토는 흰색 분장토의 표면에 언뜻언뜻 배어나와 은근한 깊이를 더한다.

오래 전 조선 분청사기는 인화문을 잃고 백토분장만으로 거칠고 어두운 태토를 감추었고 마침내 백자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인화문을 감추듯이 품고 마치 눈 녹은 자리에 새싹이 돋듯이 화인(花印)을 드러내는 분장의 변용을 보여준다.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참신한 변주다.

                                                                                                                                                          박경자(미술사학자).


< 분청, 자연을 품다 >

도예가 감진규 작가 개인전

 

인간의 미의식이 표현된 수많은 예술품들은 작품마다 독특한 미적,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적 가치의 평가기준을 자연의 아름다운 모방이라는 전통적인 미의 가치 척도인 예술적 정의에 근거하느냐, 예술작품 자체만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가치 평가의 결과는 상이하게 나타 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표현된 미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작가의 독창적인 인지 능력, 감각과 같은 주관적인 요인이 정형화된 틀을 벗고 새로운 조형 질서를 구축하여 작가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이 표현되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 자기만의 색채,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자아를 일깨우며 창의적인 조형작업을 통해 새로운 조형미를 창출해 낸다. Steven Nachmanovich의 ‘창조적 작업은 놀이와 같다. 원하는 형태의 재료를 사용해서 자유로운 추측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동서양 사상 속에 세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면서 인류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흙을 이용하여 작가만의 조형 의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예술분야가 도자 조형일 것이다.

도자 조형 즉, 도예는 ‘흙’이라는 매체를 통해 작가의 상상과 독특한 조형 세계를 펼쳐낸다.

도자는 오랜 시간을 인류와 함께 해 온 문화의 산물로 기물(器物) 위에 표현된 문양들은 자연의 정취와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도자의 역사는 인류 문화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도예계는 시대성과 현대적인 조형미가 가미된 조형도예 분야가 큰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의 도자예술문화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자기는 전통 도예일 것이다. 그 중에도 분청사기는 소박한 정취와 서민적이며 고졸한 멋으로 인해 우리와 가장 친숙한 자기로 인식 되고 있다.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재작된 민족자기로 한 줌 흙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데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야하는 도공은 자신의 맑은 정신과 혼이 담긴 자기와 너울거리는 불의 만남을 통해 도자의 새로운 탄생의 경이로움을 마주하게 된다.

도예가 김진규. 그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강조하는 현대 자기와 달리 단순한 선과 면을 통해 전통 자기의 소박함과 친근함을 지닌 자신만의 작품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곱게 분장한 도자기 분청. 작가는 도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의 모습을 단순화와 생략을 통해 독특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모란, 연꽃, 국화, 물고기와 같이 친근한 자연물의 압축된 형상들은 단순하면서 단아하게 때로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단순한 선들의 운동감과 중량감을 통해 전달되는 토속적이며 친근한 느낌은 한국적인 서정과 정서를 통해 메마른 현대인의 가슴에 따스한 정감을 심어준다.

그의 작품은 화려하고 귀족적인 청자와 달리 소박하지만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으며 친근하면서 서민적인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다. 도자기는 흙의 배합 비율에 따라 색의 차이를 보이는데 1200도 이상의 고열에 의해 소성되는 불의 미학, 고온에 열을 견디고 탄생한 강인한 예술품이기에 그 가치와 격조가 높다.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작가의 육체적인 노력, 경험. 감성과 정열 외에도 능숙하게 불을 다루는 작가의 능력과 소성이 완성될 때까지의 외로운 기다림의 결정체인 그의 작품은 인고의 시간만큼이나 친근하며 따스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가는 회색, 회흑색의 태토(胎土)로 구운 토기에 백토로 분장하는 전통적인 분청의 기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작가의 예술적 숨결을 불어 넣어 현대성을 가미한 새로운 감각의 분청을 탄생시켰다.

그는 기물(器物)에 동일한 문양을 반복적 혹은 불규칙적으로 시문하는 인화 기법으로 바탕 면에 문양을 새긴 후 그 위에 꽃, 나비, 물고기, 나무와 같은 자연의 모습을 박지기법과 상감기법으로 화면에 펼쳐낸다. 도자 위에 유연한 선과 면으로 형상화된 자연이 전해주는 순결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통해 작가는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분홍빛 목단 꽃잎은 수줍은 새색시의 발그레한 볼과 같고. 푸르른 하늘빛은 새벽녘 갓 깨어난 하늘의 민낯 같다. 파란 하늘을 헤엄치는 황금빛 물고기는 자연 속에서 유영(遊泳)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반추상의 형태로 단순화 시켜 형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다양한 색상의 안료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이미지로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 기법의 구사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타고난 예술적 감각으로 결코 서양 현대 예술에도 뒤지지 않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형식에 대한 고민 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느낌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변환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자연미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 같은 시각적 존재를 회화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연 전체를 주관적인 작가의 언어로 상징화시키기 위한 그의 도전을 최근 발표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이전까지 반추상 형태로 표현 되었던 자연물의 이미지를 색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품 제작 과정에 유색 안료를 첨가한 화장토를 넣고 백색 화장토로 재분장한 후 얇게 베껴내는 기법을 적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자연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섬세한 관찰력으로 각각의 색채가 가지는 고유한 성질과 자연을 조화 시키는 추상화 작업을 통해 작가만의 독특한 도예 미학을 실현시킨다. 그에게 있어 자연의 존재하는 수많은 색은 자연물을 상징하며 그 중 푸른색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푸른색은 그를 암울했던 시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소중한 인연과 함께 작업하며 처음 사용한색. 신성한 천상의 빛깔로 창조물을 비추는 능동성과 맑음을 간직한 색으로 괴테의 색채론에서 낭만의 상징을 표방하며 12C에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신성한 색으로 인식 되었다. 작가는 분청 위에 푸른색과 자연의 색들의 향연을 통해 작가 개인의 독창적인 예술관에 의해 재구성된 산물만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Hegel의 예술품으로서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들은 작가의 맑은 얼굴 표정에서도 느껴지듯이 순수하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부드럽고 굵은 선에서 느껴지는 강인함과 우직함이 우리 고유의 흙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적 정서와 결합하여 평화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언어는 굳이 음성언어일 필요는 없다. 기호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능력이기에 상징적 언어인 기호는 더욱 효율적이다. 작가는 인화문 분청도자 속에 기호로 작가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조형적인 환상을 담고 변화하는 유기체적 속성을 지닌 예술문화 속에 한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기체로서의 문화가 지닌 생명력은 일반적 보편성과 개별적 특수성으로 이들의 조합과 융화를 통해 추진력을 얻으며 새롭고 창의적인 것에 수용과 동시의 자신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속성이 있다. 작가는 타고난 미의식과 정감을 거칠지만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도식화하여 자유성을 표현하면서도 창의성과 시대성을 잃지 않으며 시대적 조류에 발맞춰 나아가기 위한 그의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기 위한 김진규 작가의 열정과 노력의 결실이 그의 분청도자 위에서 화려하게 꽃피는 날을 기대한다.

                                                                                                                                                          강수경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