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태 기획전 다른 생각 – 시간의 겹

이원태
2019 01/02 – 01/07
본 전시장 (1F)

다른 생각 – 시간의 겹

나의 작업은 시간 위에 나를 쌓는 작업이다.
작품에는 터치마다 나의 경험들이 함께 묻어있다.
시간의 겹, 생각의 겹, 일상의 겹 등을 작품에 한 겹 한 겹 쌓아 시간의 흔적을 담아 둔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른 경험을 한다.
말하는 것, 듣는 것, 보는 것, 만지는 것, 스치는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겹을 쌓아가며, 우리들 내면의 무엇인가를 보호하며 유지시킨다.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작품 속 작은 조각들은
마치 완성되어가는 삶의 형태를 이루어간다.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 .

My work is the task of stacking me on time.
My works have my experiences on each touch.
I put a layer of time, a layer of thought, a layer of daily life in my works, and put traces of time.
People have different experiences even when they live the same time.
Speaking, listening, seeing, touching, rubbing …
In the flow of time, we build up our own folds, protecting and maintaining something inside us.

Looking away from it, the small pieces in the work
It is a form of life that is completed.
Like ours living in the present time. . .

 

이원태의 회화

경계를 넘어 경계를 열고, 차원을 열고, 세계를 여는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업에 대한 작가들의 착상은 실로 다양한 곳으로부터 온다. 우주와 자연, 일상과 사회, 역사와 일화, 사건과 사고, 가상과 실재, 도덕과 윤리, 태도와 관념, 수행과 이념, 우연과 필연, 욕망과 상상력, 유희와 놀이, 자기반성적 사유와 때로 미술사적 형식논리와 같이 그 출처는 삶의 질이 복잡한 만큼이나 다종다양하고 예술에 대한 정의가 무색한 만큼이나 종잡을 수가 없다. 생각하는 동물답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착상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웬 착상이냐고 하겠지만 작가들의 작업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경우에 따라선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하는 관건에 해당하는 경우도 없지가 않다.
이원태의 작업에 대한 착상은 좀, 꽤나 이례적이다. 굳은살이 그것이다. 굳은살? 언젠가 작가는 발목 부위의 복숭아뼈(복사뼈)에서 떨어져 나온 굳은살을 본다. 굳은살이 잘 생기지 않는 부위지만,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반복 사용하면 모든 신체부위는 원칙적으로 굳은살이 생길 수 있다. 도통한 스님들이 한 자세로 수행에 정진한 결과 사리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부사리, 몸사리, 살사리라고나 할까.
여기서 굳은살은 처음부터 굳은살이 아니었다. 속살이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굳은살이 된 것이다. 그걸 보면서 작가는 그게 꼭 자기를 닮았고, 자신의 삶을 닮았고, 존재론적 상처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약한 존재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궁리하고 몸부림친 흔적이며,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부대낀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학적으론 단순한 죽은 세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속엔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존재일반의 생리(생존본능?)가 담겨 있다고 본 것. 자기연민이고 존재일반에 대한 연민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렇듯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껍질에서 착상되었고, 그 의미 그대로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된다. 작가의 작업이 몸에 대한 남다른 사유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에 연유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거칠고 질박한, 갈라지고 터진 부위가 비정형의 패턴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껍질에서 굳은살과의 유사성을 본다. 형태적인(아니면 질감상의) 유사성이며 특히 의미론적인 유사성을 본다. 이를테면 소나무 껍질이 처음부터 껍질은 아니었다. 속살이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껍질이 되었다. 그 꼴이 꼭 굳은살 그대로다.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속살이 굳은살이 된 것처럼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가 스스로 껍질이 된 것.

그렇게 나무껍질이 특히 소나무 껍질이 작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온다. 처음에 작가는 나무껍질 그대로를 재현하는데, 그게 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린다고만 할 수도 그렇다고 만든다고만 할 수도 없다. 그리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닌, 어쩌면 그리기와 만들기가 혼재되면서 그리기와 만들기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발상과 과정과 방법을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붓(그리고 때론 나이프?)을 이용해 투명 유리판 위에다가 나무껍질 모양으로 물감을 얇게 편다. 일종의 물감 막을 형성시키는 것인데, 그게 적당하게 굳으면 유리판으로부터 떼어내 캔버스에다 옮겨 붙인다(콜라주?). 그렇게 옮겨 붙이면서 막 위에 막을 쌓는다. 실제로 소나무 껍질을 보면 하나의 껍질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얇은 막이 층층이 중첩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이테와는 또 다르게 시간의 켜를 쌓고, 보호막을 쌓고, 상처를 쌓는다고나 할까. 그렇게 중첩된 나무껍질 형상을 화면 속에 병치시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형상의 나무껍질을 이루도록 조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단위구조를 반복 병치시켜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 속에 어우러지게 한 것인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자연인 까닭에 기계적인 반복구조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자연엔 심지어 반복구조를 취할 때조차 사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실제로 작가의 작업 역시 그렇다.
그리고 껍질을 강조할 요량으로 대비를 도입하는데, 대개는 그 속이 빨간 홍송 혹은 적송의 속살을 거친 껍질과 대비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를테면 거친 나무껍질과 부드러운 속살을 대비시키면서, 질감을 대비시키고 색감을 대비시키면서 겉과 속, 안과 밖이 대비되는 상황논리를 열어놓는다. 겉과 속 그리고 안과 밖이 대비되는 상황논리는 말하자면 비록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이분법적인,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존재일반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그 자체 주제의식이랄 수도 있는 상황논리는 재차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자기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존재조건을 유비하면서, 동시에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이를테면 여하한 경우에도 하나의 일의적인 의미로 한정되거나 환원되지는 않는 존재조건을 비유한다. 몸으로 치자면 속살도 몸이고 굳은살도 몸이다. 나무로 치자면 속살도 나무고 껍질도 나무다. 존재로 치자면 겉(페르소나 혹은 외면)도 존재고 속(아이덴티티 혹은 내면)도 존재다. 그렇게 몸에 대한 그리고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 작가의 작업은 종래에는 존재의 이중성에 대한 인정과 연민 앞에 서게 만든다.

여기까지가 몸에 대한 그리고 나무에 대한 관찰에서 유래한 존재의 이중성을 예시해주는 경우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확장국면에 들어선다. 단순히 나무며 껍질을 매개로 겉과 속을 대비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보다 추상적인 경우로, 그 자체 자족적인 형식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로 확장된다. 작가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위원소, 모나드, 단자가 반복 중첩되면서 이러저런 형태를 만드는 모듈구조를 취하고 있고, 이런 모듈구조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형태 변주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일종의 만든 혹은 제작된 오브제로 명명할 수 있는 단위원소를 화면에 병렬시켜 추상화면을 재구성하기도 하고, 무슨 모를 심듯 단위원소를 촘촘하게 세워 심어 추상적인 형태를 만든다. 무슨 피막 같기도 한 얇은 물감 막을 중첩시켜 만든 오브제를 재구성하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표면질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면을 구성하기도 하고, 형태가 화면 위로 돌출돼 보이는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보통 닥종이를 이용한 저부조 형식의 작업은 봤지만, 작가의 경우는 좀 이례적인). 때로 돌출된 화면이 빛에 반응하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미묘하게 달라져 보이는 또 다른 감각경험(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을 예시해주기도 한다. 여기서 이러저런 형태를 구성하는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오브제 자체는 거칠고 질박한 나무껍질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보기에 따라선 일일이 두드려 만든 단조처리한 철 조각의 표면질감을 떠올리게 한다. 질감이 강조되는 것도 그렇거니와 더욱이 저부조 형식의 작업이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형식적 성취를 예시해준다. 아마도 조각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이력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때로 단위원소를 얼기설기 엮어서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화면을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구조가 느슨하기도 하고 촘촘하기도 한 다양한 표정의 화면을 연출한다. 단위원소와 단위원소 사이에 일종의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인데, 때로 상당부분의 공간을 비워내 허허로운 화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여기서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오브제 하나하나는 마치 먹그림에서의 필이며 선과도 같고, 더욱이 여백에 대한 공간 감각이 한국화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의 또 다른 이력을 떠올리게 만든다. 각각 한국화 베이스와 조각 베이스가 그 경계를 허물고 융합되면서 작가만의 독특한 회화적 아이덴티티로 정착되고 승화된 보기 드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 일련의 그림들을 작가는 D(dimensional) painting이라고 부른다. 차원회화? 차원을 여는 회화? 다중 혹은 다층차원회화?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를 함축적으로 의미할 것이다. 상호간 이질적인 차원이, 이를테면 회화적 평면과 조각적 입체, 추상적 형식논리와 형상적 재현논리,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겉과 속, 안과 밖과 같은 이분법적 개념과 현상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 회화, 경계를 넘어서 또 다른 경계며 차원을 여는 회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상호간 이질적인 차원들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된 존재의, 삶의 알레고리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 시간과 세월이 만들어준 결과 겹이며, 켜켜이 내려앉은 지층과 주름이 존재의 흔적이며 상흔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존재론적인 그림이고 작업이다.

 

Lee Wontae’s art

opening the boundary, the dimension, the world over the boundary

Kho, Chung-Hwan, art critique

The artist’s idea on the work comes out of diverse places. The source is diverse as much as complication of the life’s quality and makes no sense as much as meaninglessness of the justify of art. It can be space and nature, daily life and society, coincidence and inevitability, virtual and real, morality and ethics, desire and imagination, amusement and play, self-reflective thoughts and time like the formal logic of art history. Although it is said that what the idea is, we can know the artists’ work have begun from when and how. In some cases we can often understand the artists’ work.

Lee Wontae’s idea on the work is the exception so much. It is the callus. The callus? Someday, the artist looks at the callus separated from ankle bone around his ankle. Though the part doesn’t form callus easily, all body parts have callus in principle if the part is used intensively and repetitively. It is the same reason that the conversant monks have Sari(a small stone in the body) as a result of moving on the performance with one posture. What about Skin Sari, Body Sari, Flesh Sari?

In here the callus was not the callus from the beginning. The flesh became the callus for protecting the flesh. As looking at it, the artist considers it resembled him, his life and ontological scar. He thinks it is trace that the weak existence has given consideration and struggled for protecting itself and the main agent is harassed with another agent in the relationship. That is, although it is just dead cell medically, he finds the instinct for survival is in it for protecting itself. It is compassion on the general being and self-pity. The artist’s work gets an idea from the skin out of the his own body, as the meaning itself, it expands to the pity for being itself. We can understand that the artist’s work comes from the unique thought for the body and the self-respective thought for the ontological case.

The artist finds the similarity between the callus and the pine bark that its rough, crack, and chapped part forms untypical pattern. He finds the formal and meaningful similarity. So to speak, the pine bark is not bark for the first time. The aspect is same as callus. Just as the flesh becomes the callus for protecting flesh, the tree becomes the bark itself for protecting itself.

In the way, the bark, especially the pine bark, comes to the artist’s work. At first, he reappears the bark as it is. It is not common. It is not said to either only drawing or only making. It shows an example that is unique idea and method over the drawing and making with mixing the drawing and making.

For example, the artist spreads the paints with brush (and sometimes knife) on the transparent glass plate as the bark’s shape. It forms the film of paint, then when it hardens properly, after separating it from glass plate, attach it on my own canvas. Like that attaching it, he heads up the film on the film. Even if watching the pine bark, it seems like a big bark mass, actually it forms overlapped structure with the thin films. How about heading up the layer of time different from the annual ring, protective film, and scar! The artist completes molding to form the bark of organic whole shape as juxtaposing the overlapped bark in the screen. One unit structure is repeatedly juxtaposed so that the parts and the whole are in harmony in an organic relationship. It is a point that the object is different from the mechanical repeating structure because of its nature. There is no same thing in nature even taking a repetitive structure, and so is the work of the artist. And the contrast is introduced in order to emphasize the bark, the artist usually contrasts the flesh of red pine which has red flesh to the rough bark. In this way, contextual logic is opened up by contrasting the inside and outside through contrasting the rough bark to soft flesh, contrasting textures, and contrasting colors. Contextual logic contrasting the ins and outs and inside and outside derives from observations of trees, but it is extended to an analogy expression about ontological conditions of dichotomous, dual and plural existence in general.

Here, the situation logic, which may be its own subject consciousness, is again double. In other words, likening the antinomic existence condition which is dissimilar in and out, self-dissociation, at the same time, it is recognized itself and not limited and returned to one unified meaning. When it comes to the body, both flesh and callus are the body. As for the tree, both inner parts and barks are the tree. In presence, the outs(persona or appearance) as well as the ins(identity or inner) is presence. The artist’s work, which began with observation of the body and of the tree, is led to recognition and compassion for the duality of existence.

This is the case of the duality of being that comes from observation of the body and of the tree. And artist’s work enters the expansion phase. It is extended to a more abstract case, a self-sufficient formal logic from contrasting the ins and outs by the medium of a simple tree and bark. The artist’s work basically takes a modular structure which makes various forms by repeatedly overlapping one unit element, monad, and this modular structure enables arbitrary and arbitrary morphological variation.

For example, he reconstructs abstract screen by paralleling the unit elements that can be named as a kind of created or produced object, and makes the abstract form by standing the unit elements densely such as planting young rice plants. It is also possible to form a screen showing a prominent surface texture through the way and process of reconstructing the objet made by overlapping the thin paint film like the any blood film, and to form another screen of the low relief type showing the shape to protrude from the screen(I have usually seen the relief type using Dackjongie(the Korean traditional paper), but the artist is a little unusual. Sometimes, the prominent screen leads to an example of another sensory experience which looks subtlely different depending on viewing angle as reacting with the light. Here, the objet, the unit element constituting various shapes, itself reminds the surface texture of the rough and brittle bark, and at the same time, reminds the surface texture of the forged iron piece made by tapping each one. In addition to the emphasis on textures, the working of the relief type illustrates another formal accomplishment transcending the boundaries of plane and cubic, painting and sculpture. Perhaps it is not unrelated to the history of the artist who has a sculptural base.

On the other hand, sometimes the unit element woven in entangling reconstructs the structural and constructive screen, which produces a screen with various expressions that are both loose and dense. That is, making empty space between the unit elements, the vast screen is directed as emptying out most part of space. Here, each objet corresponding to a unit element is like a pencil and a line in a drawing in India ink, furthermore, the sense of space reminds another history of the artist who has Korean painting base. It is a rare occasion that the artist’s unique painting identity has been settled down and merged as the boundaries between Korean painting bases and sculptural bases break down.

The artist calls this series of paintings D (dimensional) painting. Dimensional painting? The painting opening the dimension? Multiple or multi-layered painting? Perhaps it may be meaningful almost all of them implicitly. The mutually disparate dimension may mean the painting which breaks down the boundaries in the binary concept such as the pictorial planes and the sculptural cubic, the abstract formal logic and the figurative reproducing logic, and semantically the ins and outs, inside and outside, overlapping one layer beyond the boundary and open another boundary and dimension. And the mutually disparate dimensions may also mean the life’s allegory of the presence overlapping with one layer. This is the right ontological pictures and work reminding the scar in the result of making layers and wrinkles in time and years.

< 작가약력 >

한성대학교 동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조각전공

개인전
2019 갤러리 인사아트 이원태 기획전(인사아트 갤러리-서울)
2018 이원태 초대전(AB갤러리-서울)
2017 이원태 초대전(장은선 갤러리-서울)
2016 다른 생각·시간의 겹(인사동 H갤러리-서울)

단체전
2018 서초미술협회 임원전(AB갤러리-서울)
2018 제1회 한국현대미술전(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시립미술관)
2018 컨템포러리 시대정신전 (자운제 갤러리-경기)
2018 제37회 대한민국미술대전 (kintex-경기)
2018 NEW THINKING NEW ART전(바이올렛 갤러리-서울)
2018 MY ART & LOVE전(리수 갤러리-서울)
2018 예담론 전(한가람미술관-서울)
2018 춘천송암전(송암미술관)춘천
2018 제13회 art mentors 회원전(gallery kosa-서울)
2018 봄,연두전 (세티미래 갤러리-서울)
2018 서리풀 ART for ART 수상작가전(서초문화회관 나비홀-서울)
2017 제2회 서리풀 ART for ART 대상전(한전 아트센터-서울)
2017 “상흔의 미학 초대전” (해움 미술관-수원)
2008 “라이브 전”(큐브 갤러리-서울)
2007 “원 전”(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서울)
2001 “화상대화 전”(종로 갤러리-서울)

수상
제37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부문 특선 수상(한국미술협회)
2017 제2회 서리풀 ART for ART 대상전 최우수상 수상(서초미협주관)

2018 터키이스타불 아트페어
2018 우즈베키스탄 문화부 초정 제1회 한국현대미술전

서초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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