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 개인전 Where she is

이종현
2023 11/29 – 12/04
2 전시장 (2F)

존재를 향한 아련한 시선

이종현 작가

 

실로 오래간만이다. 작가 이종현의 작품은 뇌리에서 희미해져 가는 향수를 자극한다. 어느덧 애호가들이나 감상자들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심미적 향유의 기회로서 예술이 주어지는 경우가 뜸해졌다. 다원주의 시대,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척도를 상실한 예술은 현상에 주목한다. 매체, 시스템, 그리고 제도에 관한 작가적 표출 또는 발언의 창구로서 예술이 기능하고 있다. (즉 현대미술은 사후적이다. 어떠한 사건이 발행한 이후 그 반응으로서 예술이 등장한다. 예컨대 세계화로 인한 이민자의 증가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노마디즘이라는 이슈로 나타나는가 하면, 자본주의의 활성화로 인한 가치의 수량화가 인간소외의 이슈로 발생하기도 하고, 각종 인권의 문제들이 인종차별, 페미니즘, 동성애 등의 이슈로 목격된다. 그리고 환경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현대미술은 얼마나 유용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현 작가의 작품을 대면했을 때, 반가움이 앞서는 이유는 그녀의 작품에 깃든 인간성에 대한 깊은 애착과 내면적 감수성을 아름답게 포착해 내는 안목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대상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아름다움의 요소를 발현시키려는 태도를 취한다. 이종현 작가는 현대미술이 유보시킨 심미적 항해를 하고 있는 샘이다. 그것이 ‘현대’와 비견되는 ‘고전’의 특징이다. 어떠한 거부나 부정이 있더라도 세월을 견뎌 끝내 유지되는 저력을 발휘하는 예술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고전이라는 말로 호명한다. 고전이라 칭함에 있어서 양식적 표현력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고전의 사전적 의미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만한 무엇이라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낙관과 성찰이 불가피해 보인다. 감히 평하건대, 작가 이종현은 이 조건을 부족함 없이 갖추었다 할만 하다. 세상과 그 속에서 유지되는 삶에 대해 그래도 긍정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뚝심 있게 일관하는 예술에 대해 갈증을 느낀다면 이종현 작가를 눈 여겨 볼만하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양식적 두 줄기는 인체누드와 초상화다. 즉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화를 고수한다. 이러한 장르적 익숙함은 자칫 우리의 안목이 재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기도 한다. 경계해야 할 감상자적 태도는 과거로부터 지속되는 관점으로 작품을 대강 보아 넘기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이종현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이질적인 느낌을 품고 등장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익숙한 관성에 의존한 감상법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전통적 양식의 인물화가 작가의 진지한 창작원리로 당대에 다시 출현했다. 그렇다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 그에 타당한 필연성에 대해 심사숙고 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지속 또는 반복은 이따금씩 현재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현대사회 또는 현대미술계가 간과하고 있는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예술적 제스처로 독해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가는 결국 인간성에 대해 몰두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인간성이란 현대에 이르러 망각과 상실의 위협에 처해있는 것이다. 본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고, 각자는 서로에게 믿지 못할 존재로서 소외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종현 작가의 작품은 인간의 아름다울 수 있는 여지를 다시 끄집어 내서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이자,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상기시키는 매개체로서 제시된다.

짧다면 한 없이 짧은 세월, 인류가 이 땅에서 이뤄낸 성과는 기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인간이란 참으로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다. 변변치 못한 신체 조건을 갖고 태어나 세상을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꽃처럼 아름답지도 못하고, 고목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내지도 못한다. 들짐승처럼 탄탄한 근육도 없으며,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없다. 하물며 날짐승처럼 날지도 못하고, 해양생물처럼 능숙하게 헤엄을 칠 줄도 모른다. 문명과 동떨어진 자연에서 다른 생물과 육체와 육체로 조우했을 때, 그들은 인간에게 얼마나 위협을 느낄 것인가?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서 지구라는 행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스럽게 볼만하다. 허나 우리 자신 말고 그 누가 인간을 대단하게 볼 줄 아는가? 아니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낼 줄 아는 족속이 또 있겠는가? 오로지 사람뿐이다.

작금의 세태를 보자면 타자란 그저 하찮은 존재인 마냥, 다른 생명체는 고사하고 인간 스스로도 재대로 볼 줄 아는 여유와 감식안을 잃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본에 현혹되어 눈이 멀고, 경쟁에 경도되어 적대심만 길러낸 모양새다. 세상만사가 다투어 이겨야 하는 것들이고, 쟁취해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고유한 인간성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칭송해 마지 않았던 시선과 음성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인간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고상한 품위에 대해 심미안을 발휘하려는 예술은 정녕 자취를 감춰버린 것인가? 아무런 목적과 의도를 갖지 아니하고 그저 바라보기 위해 인간을 마주한다면, 그 눈에는 어떠한 모습이 비춰질 것인가? 찬란한 삶의 순간이 보이고, 인체의 순수한 굴곡이 보이며, 결코 숨길 수 없는 고귀한 내면이 보인다. 이러한 시선이 작가 이종현의 눈에 의탁하여 캔버스로 옮겨진다. 작가는 존엄한 인간의 가치에 확신을 갖은 채 작업을 지속한다.

 

 

작가는 마치 어미가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랑스런 눈길로 보듬듯이 그림의 대상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드러낸다. 앞서 작품의 양식적 두 줄기를 인체누드와 초상화로 설명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분류에 불과했더랬다. 더 근본적으로는 전문모델 또는 주변인을 대상으로 한 회화와 작가 본인의 딸을 대상으로 한 회화로 나눌 수 있다. 작가는 창작의 소재를 딸로 설정함으로써 상대방을 대면하는 시선에 스스로 한계를 정해 두었다. 인간의 천태만상을 목격하고도 남을 연륜을 지닌 작가다. 그의 눈에 타인이 곱게만 보일 리 만무하다. 기어코 사람의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면 애써 딸을 작품에 끌어들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자녀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어찌 소홀함이 있을 수 있으랴. 작가는 그림의 소재가 되는 대상의 심리적 상태에 누구보다고 깊이 관여하고 충분한 공감을 토대로 인물을 완성시켜 나간다. 배경은 단순하고 문안하게 마감되었다. 복장은 아무런 꾸밈이 없이 편안하다. 이렇게 등장하는 여성의 초상은 감상자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법이 없다. 오로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포착되는 여인의 몸짓과 표정에 집중할 뿐이다. 그 형상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투명한지,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심상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이처럼 대상과의 관계적 친밀함은 작품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인물은 단지 작가의 딸이라는 신분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사랑 받아 마땅한 이 시대의 한 여인의 모습으로 표출된다. 얼굴표정, 자세, 몸짓 하나하나가 함부로 지나치기 죄스러울 만큼 강렬한 인상을 발산한다. 비록 작품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처지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묵인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온 정성을 다해 예민하게 포착된 정서는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감상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가족, 친척이나 지인 등 관계로 얽힌 상대뿐만 아니라 낯선 타자를 향해서도 아련하고 연민이 가득한 시선을 보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관점을 다시금 고양시킬 수 있도록 부추긴다.

작가 이종현은 그 누구보다 가깝고 친밀한 인물을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다소 강제적으로 자신의 시선에 애정을 덮어 씌웠다. 작가는 딸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들춰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자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작가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한들,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서는 보편성의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여러 조력자가 요청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일한 예술적 지향점에 합의하여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델들 말이다. 그리고 모델과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의 태도야 말로 현대미술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을 다시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아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두드러지게 목격되는 작품들은 일종의 르포(Reportage)형식을 띄는 경향이 강하다. 즉 일상이나 사회적 풍경을 가차없이 드러내서 문제를 고발하는 식이다. 작가는 날카롭고 예민한 시선을 유지한 채 비판적인 태도로 사회와 대립적인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이면을 드러내거나 정치적 문제제기를 주요과제로 삼는다. 현대미술은 그렇게 생생한 현장성을 확보한다. 즉 당장에 직면한 이슈를 조형적으로 구현해 냄으로써 대중의 이목을 성공적으로 집중시킨다. 그들은 사회현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꺼리는 법이 없다. 현대미술의 작가는 잘못을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하는 단호하고 깐깐한 사감의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 

르포 형식의 예술은 진실 밝히기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기 위해 당장에 직면한 현상들, 특히 수정되어야 할 현상에 주목한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가는 적나라한 사회의 이면을 드러낸다. 외형적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상당 수의 예술가들에게 미적인 감응을 주는 장면을 작품으로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작품의 소재는 단지 작가의 의도나 발언에 부합하기 때문에 일종의 수단이나 도구로서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이 이미지의 대상이 되리라는 자각 없이 소환된다. 당연히 작품의 대상이 되는 주체와의 긴밀한 협의나 합의가 배제된 것이다. 사회현상을 곧이곧대로 고발하려는 작가에게 이미지의 대상을 가공하여 미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 과정은 불필요해 졌다. 오늘날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아주 통속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논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다시 언급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대미술은 관념의 과잉과 형상의 빈곤이다.” 이 표현만 보더라도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시각적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일이 얼마나 관심 밖의 일인지,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에 대한 고려가 얼마나 미비한지 알 수 있다. 허나 아직까지 많은 미술 애호가들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기능을 유보시키는 현상에 동의한 적이 없다라고 한다면 지나친 고집이 되고 마는 것일까?

물론 사회적으로 불가피하게 도출된 합의에 대해 안티테제를 자처하며 모순을 지적하는 예술적 기능은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맹목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에 제동을 걸거나, 누락된 가치들을 상기시키는 작품들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소위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후예를 자처하는 진보적 취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아방가르드 예술이 어떻게 진취적인 변화를 이끌어 왔는지 고려한다면 결코 부정하기 어려운 것임이 자명하다. 여전히 굳건한 효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적인 목표가 늘 변화를 추동하며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이것이 확고한 기준이 되어 현장에서 다른 방향성을 추구하는 예술들을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종현 작가의 작품은 항상 실재하는 모델을 대상으로 삼는다. 모델을 불러들여 직접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현대미술의 작가에게는 퍽이나 고단하고 비효율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미적 성취를 위해 협력하는 관계는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얼마나 정정당당하고 떳떳한 처사란 말인가? 전문모델은 자신의 몸으로 시대의 미적 기준을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고 다듬는다. 적절한 식이요법과 운동은 모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또한 열정적인 모델은 자기의 몸을 비틀어 어떠한 포즈를 취할 때 인체의 조형미가 두드러지는지 고민하고 연구한다. 한편 작가는 모델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마주하고 나름의 개성을 갖춘 외모로부터 창작의도에 맞는 조형요소를 발견한다. 신체의 굴곡, 균형 잡힌 자세, 내밀한 심상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를 위해 솜씨를 숙련시키고, 색에 대한 감각을 기르며, 매체의 물성에 익숙해 지기 위한 훈련을 지속한다. 모델이나 작가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내기 위한 훈련을 쌓고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협력한 결과가 하나의 작품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유대,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이 아름다움은 애써 가꿔진 것이고, 굳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냥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경험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종현 작가의 시선에는 순수하고 우직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련함이 스며들어 있다. 불만이 가득하여 적대적으로 쏘아 보는 눈빛이 아니라 다정스럽고 여유로운 눈길로 대상을 들여다 본다.

예술의 덕목 중 하나는 개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타자의 인생에 깊이 관여해 보는 것,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경험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보는 것,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종합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 삶에 대한 보편적 이해에 근접해 보는 것, 그리고 그 보편적인 삶이 지닌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종현 작가가 실천하는 예술은 바로 이런 것이다. 딸을 포함한 타자의 존재를 신중하게 들여다 보고, 그 안에 있는 미적 감수성을 고취시키는 행위다. 작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림의 대상을 귀하게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특출난 기교를 뽐내거나 화려한 표현력으로 치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그림이다. 보기에 그저 담백하고 문안하다. 주도적인 현대미술의 조류에서 벗어난 예술적 기능을 회복시키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실로 오래간만이다. 모든 것들을 재고 따지고 난 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아름답다 말해주는 예술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By Cornerstone, 2019